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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연습] 비평글 쓰기 <오월에의 노래 외 4편> Part 1

by 희휘낙락 2022.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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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악

오월에의 노래」 외 4

 

1. 작가 소개

  이용악(李庸岳)1914년 함경북도 경성, 두만 강변의 소금 밀수업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극심한 가난 속에서 성장합니다. 함북 경성의 경성 농업학교를 32년 4월 중퇴하고, 일본으로 유학해 히로시마 흥문 중학 4학년에 편입합니다. 1933년 졸업 후 니혼대학 예술과에서 1년을 수료한 후, 1936년 일본 죠오지 대학(上智大學) 신문학과에 입학합니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 역시 극도의 궁핍 속에서 힘겹게 공부하다가 1935신인문학3월호에 패배자의 소원으로 문단에 첫선을 보이게 됩니다. 같은 해 김종한과 더불어 동인지 이인을 발간하고 계속하여 신인문학에 「애소귀언」과 「무숙자, 신가정너는 왜 울고 있느냐, 조선일보임금원의 오후벌레소리, 북국의 가을, 오정의 시를 발표합니다. 이듬해 1936년에 조선중앙일보다방, 낭만오월등을 발표함으로써 탄탄한 기본기를 다져 나갑니다. 졸업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시를 발표하던 이용악은 1937년과 1938년 연거푸 두 권의 시집 분수령낡은 집까지 발표하며 풍부한 작가적 역량을 과시합니다.

 

  1939년 대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용악은 곧 『인문평론』에 입사하게 됩니다. 이후 기자로 근무하면서 오랑캐꽃을 발표합니다. 1941년 『인문평론』의 폐간과 함께 퇴사한 뒤 1942년 낙향해 『청진일보』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3개월간 근무하다 주을 읍사무소 서기로 약 1년간 종사합니다. 하지만 1943년 모종의 사건으로 주을 읍사무소 서기 자리마저 내놓게 됩니다.

 

 

  해방 후 이용악은 상경하여 19462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해 활발히 활동하게 됩니다. 더불어 중앙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일하면서 오월에의 노래」 외 수편을 창작하며 시작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같은 해, 일제 말부터 지금까지의 발표작과 미발표작 항구에서, 슬픈 사람들끼리등을 수록한 시집 오랑캐꽃을 발표합니다.

 

  19498월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가 1950628일 인민군이 서울에 진격해 오면서 출옥하게 됩니다. 노한 눈들, 짓밟히는 거리에서, 빗발 속에서등은 이 시기에 쓴 대표적인 작품들입니다. 1951년부터 19527월까지 조선문학동맹 시분과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5611월부터 조선작가동맹출판사 단행본 편집부 부주필을 역임하였습니다. 원쑤의 가슴팍에 땅크를 굴리자는 조국해방전쟁 시기에 창작한 그의 대표작입니다. 전후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평남관개공사를 독특한 필치로 노래한 「평남관개시초」를 들 수 있습니다.

 

  1957년에 출판된 리용악 시선집에는 해방 전부터 이 시기까지에 창작된 그의 우수한 시 작품들이 편집되어 있습니다. 1963년에는 김상훈과 함께 역대 악부시가를 번역 발간하기도 합니다. 1968년에 날강도 미제가 무릎을 끓었다」를 발표한 이후로 더 이상 시작활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그 후 1971215일 병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2. 1930년대부터 해방 이후까지의 시대상과 문학의 흐름

  1930년대는 군국주의의 확대와 만주 사변, 태평양 전쟁에 이르기까지 급격한 전란 속에서 암울한 분위기를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일본의 강압 정치는 문화·예술 영역에서조차 집단적 주체와 그 이념에 대한 논의를 일절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조건 속에서 문학은 개별 창작 활동과 소그룹 중심의 동인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예술적 성취와 문제의식을 함의함과 동시에 자유시로서의 예술형식을 확실히 자리매김한 시기입니다. 민족의 언어에 대한 자각과 진보적 의식의 추구는 새로운 언술새로운 내용 및 형식을 갈망하게 했습니다. 그 덕분에 이전의 시와 구별되는 의 개념을 형성하게 됩니다. 개인적 감정을 추상적으로 표현하거나, 전통시가나 서구시의 포즈만을 모방하는 수준에 머무름으로써 상투적인 작품들이 양산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자각은 시단의 변화를 주도하게 됩니다. 3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프로시의 목적성과 모더니즘 시의 반봉건성과 실험성을 모두 함유하는 탁월한 작품들이 대두하게 되며, “고전부흥운동의 분위기를 체득함으로써 전통 수용의 체험까지를 두루 거칩니다. 이 같은 문학적 성취는 해방 전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해방 직후 문단에는 식민지 시대 문학의 청산과 새로운 민족문학의 건설이라는 두 가지 과제가 제기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은 그 실천 과정에서 문학적 이념의 대립과 갈등에 빠져들게 됩니다. 458월을 기점으로 여러 분파의 설립·반발·규합이 이어집니다. 이념 대립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표적인 좌익 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과 민족진영의 전조선문필가협회가 대립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자체가 경향성에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신문, 잡지가 대부분 조선문학가동맹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미군정의 공산당 불법화로 인해 조선문학가동맹의 핵심 인물들이 월북하게 되고, 월북 문인들로 이루어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이 조직됩니다.

 

  좌우 세력의 분열과 대립으로 치닫던 문단의 분열 과정은 시적 경향의 전반적인 특징에 압도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조선문학가동맹의 일원이었던 이용악의 경우에도 그의 첫 시집 분수령(1937)낡은 집(1938)에서 보여주었던 식민지 시대의 현실 감각과는 다른 차원의 시적 인식을 시집 오랑캐꽃(1946)에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참고 문헌>
 
1. 기본 자료
유종호, 『다시 읽는 한국 시인』, 문학동네, 2002.

2. 도서
이경희, 『북방의 시인 이용악』, 국학자료원, 2007.
권영민, 『한국현대문학사 2』, 민음사, 1993.

3. 논문
곽효환, 「이용악의 北方詩篇과 北方意識」, 한국어문학회 어문학 통권 제88호, 2005, 277~303쪽.
곽효환, 「해방기 이용악 시 연구」, 한국시학회 한국시학연구 제41호, 2014, 67~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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