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악
「오월에의 노래」 외 4편
3-1. 이용악의 시 세계
이용악(李庸岳)은 1930년대 중·후반 한국 시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시인입니다. 월북 후 북한 시단에서도 주류로 활동한 보기 드문 시인이기도 합니다. 그의 시작은 앞서 폭넓게 진행된 모더니즘의 세례 속에서 출발하였으면서도 1930년대 후반 시대적 상황을 정면으로 응전함으로써 독특한 시 세계를 일군 시인으로 한국 시사에서 그 위치가 분명합니다.
그는 일제 식민 치하라는 비극적인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나날이 가혹해져 가는 일제 말의 수탈이 가져온 비극적인 민중의 삶과 이로 인해 일어난 대규모 유이민(流移民) 문제를 깊이 있게 통찰했습니다. 이러한 통찰을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시편에 담아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유이민이 가장 대규모로 일어났던 비극적인 현장인 북방을 배경으로 당대의 핵심적인 문제를 짚어내고 있는 그의 역사의식은 주목할 만합니다.
또한 이용악 시의 특성 중 하나는 서사 지향적 언술과 결합된 서정성입니다. 혹은 서정의 매력을 잃지 않은 서사 지향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30년대 후반은 프로문학의 정신과 모더니즘의 기법이 병행하여 수용되었던 시기였습니다. 30년대의 영향권 아래 있는 이용악의 시는 당대의 많은 시인들처럼 리얼리즘 성향을 보일 뿐만 아니라 모더니즘 성향을 보이기도 하며 이러한 성향들이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상호 의존적으로 한 작품의 성취를 이루고 있기도 합니다. 서술 지향적인 시에서는 리얼리즘적 성취가 두드러져 당대 현실의 적확한 이미지를 반영하기도 하며, 초기 시나 일부 단시에서는 모더니즘적 성향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기도 합니다.
「풀버렛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이 작품은 비극의 마지막 장면 같은 무대 설정으로 작품의 효과를 증폭시킵니다. 그것은 우리 집도 일가집도 고향도 아닌 침상 없는 아버지의 최후의 밤이요 풀벌레 소리로 가득 찬 밤입니다. “최후의 최후의 밤”이라고, 그 자체가 환정적(喚情的), evocative)인 최후란 어사가 연거푸 나와 음률성도 살리면서 어떤 비장감을 더해줍니다. 이어서 러시아 땅에서의 고생스러운 삶이 암시되며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눈을 감은 이의 최후가 구체적으로 서술됩니다. 뒤늦게 불러온 의원의 속수무책, 그리고 이웃 노인의 손으로 흰 무명을 덮은 얼굴, 자녀들의 곡성과 풀벌레 소리에서 보게 되는 서사 충동의 서정적 처리는 소박한 직접성 때문에 매우 호소적입니다. “상(想)이 앞서거나 개념(槪念)으로 흐르지 않는”1)다는 지적이 딱 들어맞는 이용악 초기의 수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비극적인 개인의 가족사에서 그치지 않고 동시대 동지역 내 사람들에게 일어난 가족사로 읽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힘겨운 가족사의 한 장을 설익은 관념으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분출하는 방식이 아닌 담담하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당대 현실을 그려냅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죽음이 개인 또는 한 가족의 비극에서 그치지 않고 일제 치하 비극적인 가족사의 전형성을 획득하는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보이는 이용악의 상황이나 사건에 대한 시적 거리감과 객관적인 태도 그리고 슬픔을 풀벌레 소리에 투사시키는 기법의 세련성 등은 다른 시인들의 초기 시에서 보이는 미숙한 습작기의 모습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이미 상당한 문학적 수업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낡은 집」
「낡은 집」은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마을 내 흉가의 내력을 들려줍니다. 30년대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한 겨울에 야반도주하여 북방(만주 혹은 러시아)으로 유이민을 떠나는 한 가족의 비참함을 담은 이야기 시입니다. 이용악은 8연 50행에 이르는 비교적 긴 시에서도 객관적인 서술과 담담한 어조 그리고 감정에 함몰되지 않는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여 한결 극적으로 피폐한 당대의 삶을 형상화하는 시적 성취를 이룩합니다.
「풀버렛 소리 가득 차 있었다」가 개인의 비극이라면, 「낡은 집」은 이웃 친구네 집의 비극을 그린 것이며 나아가 30년대 유이민으로 대표되는 비극적인 삶으로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낡은 집’은 일제 치하의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삶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으로, 더 큰 정형성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특히 4연의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 6연의 “북쪽을 향한 발자옥만 눈 우에 떨고 있었다”와 같은 구절은 시대적 배경이나 사건, 상황을 압축하는 동시에 이를 서정적으로 세련되게 치환시켜내는 이용악의 뛰어난 기법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합니다. 관념으로 흐르지 않고 구체적인 이미지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현실 인식을 담고 있는 이용악 시편의 기본 성향은 서사 충동을 내장한 채 고유한 서정적 울림을 획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임화를 위시한 프롤레타리아 시인과의 차이성을 드러내 주는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각주
1) 유종호, 『다시 읽는 한국 시인』, 문학동네, 2002, 179쪽의 각주 2)에서 따르면 이용악의 첫 시집 『분수령』 서문에 이규원(李)揆元)이란 친구가 남긴 말을 원문 그대로 옮겨두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참고 문헌>
1. 기본 자료
유종호, 『다시 읽는 한국 시인』, 문학동네, 2002.
2. 도서
이경희, 『북방의 시인 이용악』, 국학자료원, 2007.
권영민, 『한국현대문학사 2』, 민음사, 1993.
3. 논문
곽효환, 「이용악의 北方詩篇과 北方意識」, 한국어문학회 어문학 통권 제88호, 2005, 277~303쪽.
곽효환, 「해방기 이용악 시 연구」, 한국시학회 한국시학연구 제41호, 2014, 67~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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