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악
「오월에의 노래」 외 4편
3-2. 이용악의 시 세계
「오랑캐꽃」
「오랑캐꽃」은 이용악 시의 백미로 일컬어지며 특이한 서사와 복합적 의미 그리고 응축된 서정으로 수려한 시적 형상을 이룬다고 평가됩니다. 「오랑캐꽃」은 작품 초반 민간어원론에 언급된 오랑캐꽃의 어원을 짧게 소개합니다. 꽃의 뒷모양이 머리채를 드리운 오랑캐의 뒷머리와 비슷하여 이름 지어졌다는 소개 이후 그 무고함과 억울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오랑캐는 구체적으로는 여진족으로 알려진 부족을 가리킵니다. 시에 나오는 오랑캐는 고려조 때 함경도에 잠입해 들어와 판도를 넓혔다가 12세기 윤관에게 토벌을 당하였던 이른바 생여진(生女眞)족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고려 장국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란 대목은 역사에 나오는 윤관의 대첩과 관련되는 전승일 것입니다. 2연의 4행은 고려 군사에게 쫓기어 아마도 두만강 건너로 패주해 가는 여진족의 모습을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으로 보여줍니다. 3연은 여진족 정벌 이후 많은 세월이 흐른 것을 이야기합니다. 흐르는 구름과 흐르는 세월은 흐름이라는 매개항을 통해 수사적 동일선상에서 처리되어 있습니다. “무지무지”, “골짝골짝”과 같은 되풀이는 이용악이 선용한 어법으로 운율감을 성공적으로 조성합니다. 마지막 연의 “두 팔로 햇빛을 막아”준다는 것은 숨어 울 자리를 제공해준다는 것으로 감정적인 외침이 아닌 핍박당하는 변두리 피차별자의 설움과 소외 경험을 공감적으로 노래합니다. 오늘날에도 「오랑캐꽃」은 약소민족이나 소외계층, 사회적 문화적 소수파의 표상으로서 각별한 울림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전라도 가시내」
화자인 함경도 사내는 지금 북간도의 술막에 앉아 있는데 밀고자들이 사방에 깔려 있는 상황을 몇 마디로 압축해서 기술합니다. 발을 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그는 전라도에서 올라온 가시내에게 동병상련의 정을 느낍니다. 그것은 고향 상실과 뜨내기 됨과 가진 것 없음이 이어주는 공감과 연대감입니다. 그러나 함경도 사내와 전라도 가시내의 만남은 잠시 동안의 일입니다. 날이 밝으면 사내는 우줄우줄 얼음길을 나설 것이고, 그러면 지난밤의 노래도 자욱도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체관(諦觀) 어린 현실인식이 시의 저변에 깔려있습니다.
이 둘의 만남은 한반도 양 끝 출신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극적이며, 조선 내에서도 소외되고 차별받아온 지역이라는 점에서 비극이 중첩되어 설정이 절묘합니다. 일회적인 우연한 만남과 헤어짐은 망국민의 부평전봉(浮評轉蓬)2)의 구체성을 보여주는데 시인의 의도 여부와 상관없이 뿌리 뽑힌 식민지 고향 상실자들의 삶의 표상이 되어 있습니다. 이용악은 북방에 팔려온 여인들의 모습과 처지를 통해서 매우 선명한 형태로 제시된 식민지 백성의 몰락상을 형상화하여 보여줍니다. 아울러 비참한 유이민들의 삶을 경직된 관념이나 구호적인 언어가 아닌 그들의 삶에 밀착한 일상어를 통해 전달함으로써 같은 소재를 다룬 다른 시인들이 도달하지 못한 호소력과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카프 계열의 시인들이 꾸준히 시도했으나 이렇다 할 문학적 성취로 이어지지 못했던 모티프가 이용악 시에 와서 성공적으로 구상화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월에의 노래」
해방과 분단 과정을 거치면서 북을 택한 이용악 시 세계는 앞서 보여준 시 세계와는 사뭇 다른 지점에 있습니다. 1946년 7월 『문학』을 통해 발표된 「오월에의 노래」는 해방 후의 작품입니다. 해방과 분단 과정에서 이용악은 사회 현실에 적극 참여하였고, 한국 전쟁과 전후 북한 문단의 형성과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직책을 수행하면서 1960년대까지 북한 시단의 중심에서 활동합니다. 이용악의 1930년대 후반부터 40년대 초반의 시 세계와 한국 전쟁 이후 시 세계의 차이는 문학적 태도와 작품의 대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용악의 시적 특성은 공유하고 있지만, 전자는 ‘문학’이라는 지점에, 후자는 ‘현실 참여’와 그가 선택한 ‘체제와 이데올로기에 종사’라는 지점에 각각 방점을 찍고 있는 것입니다.
「오월에의 노래」에서의 오월은 노동자의 날을 가리킵니다. 이 시는 해방 전의 시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용악의 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리듬과 압축미가 있으며 북쪽 풍경이 배경화 되어 있습니다. 시적 내용은 노동자들과 함께 가는 세상이나 허약한 지식인상과의 결별 등으로 읽을 수 있으나 이러한 시적 내용은 다양한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상징을 획득하고 있으며 일견 서정성도 엿보입니다.
이 시에서는 특히나 지식인의 사유와 고뇌가 잘 드러납니다. 각 연의 말미에 있는 “거울 속에 너는 있어라” 부분이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이 시의 지배소(dominant)인 “거울”은 과거의 나를 비추며 그 속의 모습들은 과거의 자화입니다. ‘거울’은 집중적으로 조명되는 특정한 나의 모습의 반영이며 동시에 ‘현실과의 단절’입니다. ‘단절’로 읽을 때 시인의 의도가 보다 명확하게 다가옵니다. 또한 ‘거울’과 동반되는 ‘너’는 당대 민중으로 상정되는 청자이며 또한 시적 화자 자신이기도 합니다. 1연에서 “왜접시”로 표상되는 일제강점기를 통해 “빨뿌리”와 “담뱃재”는 초조와 고통의 양태를 보여줍니다. 한 때 지식인의 자양분이었던 책은 “인젠 불살러도 좋은” 것으로 현재의 나와는 유리되어 있습니다. 일제 하에 당당하지 못했던 심약한 지식인과 그의 생각들은 “거울 속에 너는 있어라”에 의해 현재와 단절됩니다.
2연의 배경은 “몹시도 시장하고 눈은 내리던 밤”으로 가난한 시절의 북쪽 밤이 고골리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떠오릅니다. 고골리는 하급 관리의 비참한 생활상이나 몰락한 지주 계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러시아 작가입니다. 실제가 아닌 서적을 통해 만나는 나라란 점에서도 지식인의 허상이 잘 담겨 있습니다. 소설가인 친구와 웃으며 나누었던 고골리의 나라 이야기는 아마도 하급 관리의 소시민적 근성이나 몰락한 지배 계층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대한 풍자일 터입니다. “소시민”은 이 시의 또 하나의 지배소이기도 한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시민적 근성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소시민의 개인적이고 나약한 모습을 걷어내지 않고서는 달성될 수 없는 전 민중적인 목표의 도래를 시적 화자는 말합니다. 이 시대는 흔들리는 지식인의 비겁과 안이함으로는 지탱될 수 없음을 자각합니다. 얼룩진 벽에는 “검은 모자와 귀걸이”로 상징되는 저급한 귀족적 취향과 소부르주아적 근성이 화자와 유리된 채 걸려있습니다. 다시 화자는 “거울 속에 너는 있어라”라고 표현함으로써 이 모든 상황에의 결별을 고합니다.
3연에서 시적 화자는 거울 속의 너와 닮지 않은 새로운 세상을 말합니다. 그것은 “그리웠던”을 4회나 반복하리만큼 오랜 희구인 “메에데에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푸른 하늘”과 동격으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거울 속의 ‘너’와 대비되는 ‘우리’입니다. 메이데이는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우리’인 것이기에 그토록 기다려왔던 소중한 것입니다.
4연은 1행과 2행이 분리되는데 “동무들이 희망과 초조와 떨리는 손으로 주워 모은 활자들”은 함께 가는 길에 대한 떨리는 희망과 그 길을 가는 방법으로서의 문학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신문지 우에 독한 약봉지와 한 자루의 칼”은 단절하고 싶은 화자 자신의 모습입니다. 이용악은 지병인 폐병으로 사망하였는데 독한 약봉지는 시인의 지병을 연상시킵니다. “한 자루의 칼”은 ‘칼’에 비중을 둔다면 제거해야 할 대상에 대해 날을 세우는 모반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한 자루”에 비중을 두면 1연과 2연에서 보여주는 허약한 지식인의 모습과 연결되어 ‘나 하나의 힘’으로 상정할 수 있습니다. 독한 약봉지에 의지하는 약한 모습과 나 혼자만의 칼은 “거울 속에 너는 있어라”에 매개합니다. 환언하자면 나 혼자만의 폐쇄적인 분노에서 벗어나 “동무”들과의 동반 의식을 갖자는 것이며, 희망에 대한 간절함이 떨림이 되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4연의 “동무”와 3연의 “우리”는 한 묶음이 됨으로써 “오월에의 노래”는 나의 노래가 아닌 우리의 노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시는 구호적 격문시나 투박한 상투형을 멀리하면서 정치시를 추구합니다. 당대 현실의 문제에 접근해 있으며 산문적인 진술에 가까운 언어의 일상적인 표현을 시 속으로 대담하게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시인이 의도했던 것은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세상이지만, 이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낭만적 성향을 띤 고뇌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4. 문학사적 의의
이용악은 현실과 밀착된 시, 시대적 궁핍과 비극성을 어느 시인보다도 뼈저리게 공감하여 작품으로 표현했습니다. 나아가 그의 자전적 체험은 식민지 현실을 드러내는 포석의 역할을 함으로써 당대의 사회적 핵을 시화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임화에게서 가장 높은 구현을 보았던 카프 계열의 시는 문학사적 관심을 떠나서 그 자체로 읽을 만한 매력을 상실한 지 오래입니다. 전경화 된 전언에 정감이 따라주지 않고 시어가 무잡하기 때문입니다. 이용악에 와서 비로소 생활과 현실이 서정적 밀도와 강도 속에서 구상화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조그만 일이 아니며 기억해두어야 할 문학사적 사건입니다. 물론 이용악의 성취가 가능했던 것은 선행 시인들의 모국어 가능성의 탐구가 의지할 만한 선례가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와 동년배의 모든 시인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이용악의 강점은 현실주의 지향의 시인들이 자칫 빠지기 쉬운 이른바 ‘기교’ 경시와 소재 결정론에서 자유로웠다는 점입니다. 모든 시편에서 어사의 되풀이를 통한 음률성의 확보를 인지하게 되는데 이것은 전언의 전경화에 만족하지 않은 이용악의 시적 노력이 형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현실주의 지향의 시인들은 대체로 시인이기 전에 현실주의자란 자의식에 구애받았습니다. 이용악은 현실주의 시인이 현실주의이기 전에 시인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20세기 전반의 최초의 사례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당대의 현실주의 시편들은 빈한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각주
2) 살 도리가 없어 정처 없이 떠다니는 낙오된 신세를 이르는 말.
<참고 문헌>
1. 기본 자료
유종호, 『다시 읽는 한국 시인』, 문학동네, 2002.
2. 도서
이경희, 『북방의 시인 이용악』, 국학자료원, 2007.
권영민, 『한국현대문학사 2』, 민음사, 1993.
3. 논문
곽효환, 「이용악의 北方詩篇과 北方意識」, 한국어문학회 어문학 통권 제88호, 2005, 277~303쪽.
곽효환, 「해방기 이용악 시 연구」, 한국시학회 한국시학연구 제41호, 2014, 67~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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