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그려 앉기
- 문성해 「오늘도 나는 쪼그리고 앉습니다」
1. 들어가며
노자의 도덕경 66장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강과 바다가 온갖 계곡 물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잘 낮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갖 계곡 물의 왕이 될 수 있다. -중략-(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최진석, 소나무)’ 인용 부분을 간단히 해석하자면, 낮출수록 높아진다는 의미입니다. 도덕경의 전체 맥락을 빌려오기보다 이 구절만을 빌려온 것은 물의 낮춤과 문성해의 「오늘도 나는 쪼그리고 앉습니다」에서 그리는 “쪼그리고 앉”음의 자세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쪼그리고 앉”음은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자세를 낮추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낮은 위치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숨죽인 관찰을 연상하게 합니다. “쪼그리고” 세상을 관찰하다 보면 스스로의 신체로부터 불편함을 감지하게 됩니다. 신체의 불편함은 통증이라는 감각으로 느껴집니다. 이는 오롯이 내가 나이기 때문에 느끼는 감각으로 대상(세계/당신)에서 나에게로 의식을 옮기게 합니다. “쪼그리고 앉”아 사물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대상(세계/당신)에 대한 관찰과 주체(나)에 대한 관찰을 반복합니다. 이는 스스로를 “이제 막 직립을 시작한 원시인처럼” 새롭게 태어나게 만들어줍니다.
2. 쪼그리고 앉는다는 것
우리는 깊은 생각 혹은 고뇌에 빠질 때 흔히 팔짱을 끼거나 고개를 숙이는 식으로 몸을 움츠립니다. 보통 기지개를 켜거나 온몸을 나른하게 늘어뜨린 사람을 보고 고뇌에 잠겼거나 깊은 생각에 빠져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몸을 움츠린다는 것은 집중을 위한 준비 단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쪼그리고 앉는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움츠린 자세입니다. 본문에서는 문성해의 「오늘도 나는 쪼그리고 앉습니다」를 통해 그러한 쪼그리고 앉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차근차근 헤아려 나가보려 합니다.
연골연화증에는 좋지 않다고 하지만
쪼그리고 앉는 자세는 펑퍼짐하게 앉는 것보다
골똘하기에 좋습니다
화자는 “연골연화증에는 좋지 않”고, “펑퍼짐하게 앉는 것보다 골똘하기 좋”은 자세가 “쪼그리고 앉는 자세”라고 말합니다. 연골연화증은 무릎의 물렁뼈가 약해지는 질환으로 단순 부종에서부터 지속되면 균열과 손상에까지 이르는 병증입니다. 이같이 몸에 무리가 가는 자세인 데다가,, 편히 쉴 수 있는 자세도 아닌 것이 “쪼그리고 앉는 자세”입니다.
무릎에 젖가슴을 대고 앉아 있으면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작불을 바라볼 때처럼
맘이 한곳을 보게 됩니다
“무릎에 젖가슴이” 닿도록 온몸을 둥글게 웅크린 자세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자세입니다. 또한 바로 누운 자세를 제외하고 가장 낮은 시야를 가지게 합니다. 쪼그려 앉아 바라보는 시선은 서있거나 앉아있는 시선에 비해 그 시야 반경의 폭이 넓습니다. 가장 작고 낮은 자세는 그만큼 포용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많아지는 모양새입니다.
허벅지와 장딴지가 맞닿고, 무릎과 가슴이 밀착되며 두 팔로 양다리를 감싸 안은 모양새는 구석과 구속의 이미지륻 동시에 떠올리게 만듭니다. 인간은 탁 트인 넓은 공간보다 좁고 갑갑한 다락방과 같은 장소에서 보다 깊은 사유가 가능합니다.1) 구석은 인간의 모든 감각이 예민해져 집중도가 현저히 상승하는 공간입니다. 이는 구속과 같은 압박 심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한되고 속박되는 상황에서는 어지러운 생각보다 한 가지에 집중하게 됩니다.
화자가 제시하는 상황을 상상해봅시다. 어두컴컴한 재래식 부엌의 아궁이에서 장작불이 타고 있습니다. 주위의 어숨프레함에 비해 아궁이의 장작불만이 조용하고 밝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작불을 바라보고 있는 내가 있습니다. 장작불에 빼앗긴 시각은 간간이 튀어 오르는 불씨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되고, 청각은 나무들이 타들어가는 마찰음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정면으로 느껴지는 따스함과 등 뒤의 서늘함이 선명하게 다가오고, 마른 가지의 탄 냄새가 후각을 자극합니다. 이 모든 감각들이 어우러져 내가 대상(불씨, 마찰음, 온도, 탄 냄새)과 나(시각, 청각, 촉각, 후각) 스스로에게 집중하게 만듭니다. 달리 말하면, 대상을 느끼고 있는 나에게 집중하게 만듭니다. 낮기 때문에 넓게 보게 되고, 웅크렸기에 깊이 볼 수 있습니다. “맘이 한곳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이러고 있으면 당신을 더 잘 볼 수 있고
당신이 나에게 질리기 전에 무릎을 펴고
당신을 훌쩍 더 잘 떠날 수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대상을 느끼고 있는 나에 대한 집중, 즉 사유의 과정은 지속될수록 더 깊고 보다 넓게 확장되어갑니다. 사유의 확장은 “당신”을 바라보는 나, “당신”을 느끼고 있는 나를 예민하게 만듭니다. 그렇기에 “더 잘 볼 수 있고”, “질리기 전에” “훌쩍 더 잘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무릎과 가슴이 딱 붙어
외따로이 팔만 내민 채 무언가를 납땜질하는
당신은 곤충과도 닮았습니다
그런 당신을 납죽 들어다가 산속에 놓으면 바위가 되고
들판에 놓으면 탑이 됩니다
쪼그리고 앉는 일은
바닥도 허공도 아닌
오로지 나에게만 속하는 일
쪼그리고 앉아 “팔만 내민 채 무언가를 납땜질하는 당신은 곤충”을 닮아 보입니다. 그리고 그런 “당신”을 “산속에 놓으면 바위”가 되기도 하고, “들판에 놓으면 탑”이 되기도 합니다. 이는 사유의 변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응시하고 있는 대상(대상을 느끼고 있는 나)은 처음엔 보이는 그대로의 이미지를 띄고 있습니다. 상상해봅시다. 두 무릎을 바싹 붙여 가슴에 대고 있는 모습은 머리와 몸통, 팔만으로 이루어진 곤충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하지만 사유는 표면의 이미지를 상상하는 것에 멈추지 않습니다. 나아가 산속에서의 이미지, 들판에서의 이미지로 확대됩니다. 이는 내 안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과정입니다. 그렇기에 “쪼그리고 앉는 일”은 “오로지 나에게만 속하는 일”, 나의 사유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나는 이 새벽 이부자리 위에
이제 막 직립을 시작한 원시인처럼
쪼그리고 앉습니다
화자는 “오늘도” “이제 막 직립을 시작한 원시인처럼” “쪼그리고 앉”습니다. 이제 막 진화의 첫 과정에 발 디딘“원시인”은 깨달음 혹은 발견의 시초입니다. 화자는 “새벽의 이부자리 위에”서 “오늘도” “쪼그리고 앉”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의 발견을 위해 사유의 길을 걸어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러고 있으면 재래식 화장실에 앉아
신문지 조각을 읽을 때처럼 엉덩이가 시려옵니다
(중략)
맘이 몸을 이기는 날
우리는 득도에 이를 겁니다
발견을 위한 사유의 걸음이 득도에 이르는 길을 걸어갑니다. “재래식 화장실에 앉아 신문지를 읽을 때처럼 엉덩이가 시려”오는 자세로 “아직” “득도한 사람”은 없습니다. 화자는 쪼그려 앉는 자세를 통해 “바위와 바위 사이 무릎을 비비며 우는 귀뚜리나 여름 여치들, 무릎으로 걸어가는 왜소증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그들 모두 깊은 사유를 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춘 자들입니다. 사방이 막혀 어두운 바위 구석에서 우는 “귀뚜리”와 “여름여치”들의 작음, 다른 이들에 비해 삶의 구속을 받고 사는 “왜소증 사람들”의 낮음은 “나의 가련한 신도들”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입니다. 그들과 화자, “우리”는 “그저 틈이란 틈을 다 찾아 들어가서 쪼그리고 앉아 하루 종일 울거나 멍때리”며 “맘이 몸을 이기는 날”을 향해 걸어갑니다.
마음이 몸을 이기는 것, 그것은 물과 같이 낮기에 높아질 수 있는 진정한 쪼그리고 앉는 자세, 즉 새롭게 태어날 깨달음의 자세입니다.
3. 나가며
도덕경 8장에서는 물에 대하여 이렇게 서술합니다. “물은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는 낮고도 더러운 곳을 향해 흐른다. 그리고 그 낮고 더러운 곳에 머물며 다른 사물들에게 수분을 공급하고 이롭게 한다. 거기서 생명을 불어넣고 또 새로운 싹을 틔우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바로 도를 체득한 자의 모습니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최진석, 소나무)” 쪼그리고 앉음의 자세는 불편하고 낮은 자세입니다. 하지만 나로 하여금 대상(혹은 나)에게 몰두하게 만들어 보다 풍요로운 사유의 길을 열어줍니다. 이 같은 집중의 자세를 통해 우리는 득도와 같은 깨달음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예기치 못한 발견을 하고 삽니다. 그리고 매순간 의식하지 못한 채 그것을 놓치며 삽니다. 길가에 핀 작은 꽃을 발견하지만, 꽃을 통해 무언가를 느끼려고 마음먹기엔 너무도 하찮은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이제 그 꽃 옆에 쪼그리고 앉아봅시다. 웅크린 자세로 넓고 깊게 세상을 보도록 해봅시다. 아주 사소한 것도 의미를 지니고, 의미는 나만의 사유 방식을 통해 나만의 깨달음을 만들어냅니다.
시인 문성해는 작품 「오늘도 나는 쪼그리고 앉습니다」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자세를 알려줍니다. 또한 자신 역시 “오늘도” 그 자세를 통해 깊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내일 역시, 쪼그리고 앉아 세상을 바라볼 것입니다.
각주
1) “몽상을 작은 공간으로 몰입시키면 그 몽상은 더 역동적이 된다.”, “그대 삶의 공간을, 침실 바닥과 구석들을 하나하나 방문하고 몸을 옴츠려 그대 달팽이 껍질의 가장 깊은 마지막 구부러진 구석에 자리 잡으라.(저자 주 :「픽스라인의 삶」, 장 파울 리히터, 불역서, 230p)” 이는 가스통 바슐라르 Gaston Bachelard의 「공간의 시학」(곽광수 역, 동문선)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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