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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론] 지그문트 프로이트 <문명 속의 불만> 요약 Part 2

by 희휘낙락 2022.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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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프로이트 <문명 속의 불만>

환상의 미래」 요약 Part 2

환상의 미래」는 사회현상으로서의 종교를 고찰한 프로이트의 주요 저작입니다.

 

4. 문명이 종교적 관념들을 만들어낸다는 의견은 자연스럽게 들리지 않습니다.

  종교적 관념은 우월한 자연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문명의 결함을 수정하려는 충동에서 생겨났다고 말했습니다. 종교적 관념들은 이미 만들어진 상태로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개인이 혼자 힘으로 그런 종교적 관념들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연의 인간화가 인간이 느끼는 무력감을 없애고 자연력과 관계를 맺고 그것에 영향을 주어야 할 필요성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원시인의 경우로 생각해보면 그것은 타고난 본유 관념일 뿐이며 필요성을 만족시키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입니다.

 

  인간의 사고 활동은 단순한 호기심의 표현이 아닙니다. 인간은 최초의 환경에서 주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야말로 그들에게 영향을 주는 방법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중에 마주치는 모든 것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갖기 위해, 어릴 적과 똑같은 방식으로 관계를 대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사고방식에 동기와 기원을 추가하고 싶다, 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종교의 기원은 「토템과 터부에서 언급한 종교의 기원과는 다른 관점입니다. 토템과 터부의 목적은 종교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토테미즘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토테미즘은 후세의 신 신앙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토템 동물은 신성한 동물이 되었고, 살인과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인류 최초의 도덕률은 토테미즘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 저술은 종교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 이바지 할 수 있는 특정 분야만을 구분해 낸 사례입니다.

 

  아버지 콤플렉스와 무력감의 연결고리는 어린아이의 무력함과 그 연장인 어른의 무력함이 맺고 있는 관계에 있습니다. 종교 형성에 관한 정신분석적 동기는 의식에 나타난 동기를 형성하는 유아기의 원인과 같습니다. 어린아이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어머니는 사랑의 첫 대상이 되고, 이는 곧 강한 아버지에게로 옮겨갑니다. 유아기가 끝날 때까지 아버지는 그 지위를 유지합니다. 아버지에 대해 아이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이 암시는 모든 종교에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스스로 신을 만들고, 그 신을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의 보호자 역할을 그 신에게 맡깁니다. 유아기의 무력함에 대한 자기 방어의 자세가 종교 형성이라는 어른의 반응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합니다.

 

5. 종교적 관념들이 갖는 심리학적 의미는 무엇이며, 그 관념들을 우리는 어떤 표제로 분류할 수 있는가?

  종교적 관념들은 외적(또는 내적) 현실의 사실과 상황들에 대한 가르침과 주장들이며, 우리가 혼자서는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말해 주고 그것을 믿으라고 요구합니다. 물론 세계의 다양한 사상들에 관해 알려주는 가르침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모두 그 내용을 믿으라고 요구하지만, 그 내용이 진실이라는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긴 합니다. 종교의 가르침은 원시적 조상들이 믿었으니까, 원시 때부터 전해 내려온 증거가 있기에,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다는 것이 믿음의 근거입니다. 의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금지하는 이유는 그 사회가 그 주장의 불확실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회피하기 위한 두 가지 시도를 언급하자면, 최초의 시도는 초기 기독교 교무의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는 선언입니다. 이 말은 종교적 교리가 이성보다 위에 있다고, 즉 이성의 관할권 밖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는 고백으로서만 흥미로울 뿐, 권위있는 의견으로서는 전혀 구속력을 갖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타고난 이성을 활용하라고 요구할 수는 있지만,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동기를 근거로 하여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의무를 제정할 수는 없습니다.

 

  두 번째 시도는 <마치>철학이 행한 시도입니다. 이는 우리의 사고활동 속에는 수많은 전제들이 내조되어 있어 그 전제들이 아무 근거도 없을뿐더러 불합리하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것들은 의설이라고 불리지만, 여러 가지 실제적 이유로 우리는 <마치> 그 의설을 믿는 것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종교적 교리는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데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구실을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성이 부족함에도 인류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종교적 교리의 내적인 힘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이성의 승인과는 관계없이 유효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를 자문해야 합니다.

 

 

6. 종교적 관념들의 정신적 기원으로 관심을 돌리보자.

  교리의 형태로 주어지는 종교적 관념들은 경험의 침전물도 아니고 사색의 최종 결과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환상이며,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강력하고 절박한 원망의 실현입니다. 자연의 무력감이 평생 동안 지속된다는 인식은 아버지라는 존재에 매달려야 할 필요성을 낳았지만, 이번에는 훨씬 강력한 아버지가 그 대상이 되었습니다. 유아기의 아버지 콤플렉스에서 생겨나는 갈등이 마음에서 제거되고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형태로 해결된다면, 개인의 마음은 커다란 위안을 얻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모두 환상이라고 부르려면, 환상이라는 낱말의 의미를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환상의 특징은 바로 인간의 원망에서 유래한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서 환상은 정신병적 망상과 비슷합니다. 망상과 환상은 여러 가지로 다릅니다. 망상은 현실과 모순된다는 점이 불가결한 요소로 강조됩니다. 하지만 환상은 반드시 허위일 필요는 없습니다. 실현 불가능하거나 현실과 모순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갖게 된 주요 동기가 원망 실현일 때 그 믿음을 환상이라 부르고, 환상 자체가 입증을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환상과 현실의 관계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모든 종교적 교리는 입증할 수 없는 환상입니다. 대부분의 종교적 교리에 대해서는 현실적 가치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입증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박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는 종교적 교리가 심리학적 속성에서는 환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7. 우리 문명은 종교적 교리 위에 세워져 있고, 인간 사회는 종교적 교리의 진실성을 믿는 대다수 사람들을 기반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종교적 진실성을 증명할 수 없다 해도, 우리는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 <마치>철학이 지시한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인간은 냉정한 과학으로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절대적인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당신은 심리학자로서, 본능적 생활에 비하면 지성이 인간사를 맡고 있는 역할을 지극히 사소하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소중한 원망 실현을 인류한테서 박탈하고 지적 영양분으로 보상하겠다고 제안하다니, 너무나 일관성 없는 일이 아닌가 싶을 것입니다.

 

  지성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론자입니다. 종교적 교리에 깊이 의존해 있는 독실한 신자들은 내 주장에 압도될 위험이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내가 말한 것은 이미 다 말해져 온 것입니다. 다만 그 의견에 심리학적 근거를 약간 추가했을 뿐입니다. 변론하자면, 종교가 인류 문명에 크게 공헌한 것은 분명합니다. 종교가 행복과 위로와 삶과의 조화를 이루게 하고, 문명의 수단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면, 현재 상태를 바꾸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문명에 불만을 품고 있고, 문명을 벗어던져야 할 멍에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가 과학의 진보 탓에 종교의 영향력이 일부 사라졌다는 반론이 제기될 것입니다. 그 반론 자체는 설득력이 전혀 없습니다.

 

  종교적 교리가 절대적인 지배력을 갖고 있었을 때 인류가 지금보다 더 행복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그들이 지금보다 더 도덕적이 아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어느 시대에나 종교는 도덕성 못지않게 부도덕성도 지원해주었습니다. 인간의 행복과 문화에 대한 감수성 및 도덕적 규제라는 점에서 종교가 이룩한 것이 고작 이 정도라면, 우리가 종교의 필요성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문화적 요구의 토대를 종교에 두는 것이 과연 현명한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식의 보물 창고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많아질수록 종교적 믿음에서 멀어지는 현상은 더욱 광범위하게 일어납니다. 문명은 교양인이나 정신노동자들에 대해서는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문명의 전달수단입니다. 그러나 문명을 적대시할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는, 교육 받지 못하고 억압당하는 대중의 경우에는 문제가 다릅니다. 문명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는 대중이 그들을 혹사하는 작업 감독의 약점을 발견하고, 그 약점을 향해 적개심을 터뜨릴 위험이 없을까? 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신의 징벌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주저 없이 이웃을 죽일 테고, 그렇게 되면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지상의 권력뿐입니다. 따라서 이 위험한 대중을 최대한 엄하게 다스림으로써 그들이 지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철저히 봉쇄하거나, 아니면 문명과 종교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고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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