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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론] 르네 지라르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Part 1

by 희휘낙락 2022.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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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지라르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요약 Part 1

 

삼각형의 욕망

  르네 지라르는 욕망하는 주체와 욕망의 대상 사이의 관계를 기존의 직선 구조에서 중개자를 추가한 삼각형의 모습으로 설명합니다. 주체가 스스로 형이상학적 욕망을 발생시킬 수 없을 때, 그들은 자신이 모방할 중개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르네는 그 과정을 간접화라고 칭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간접화는 외면적 간접화와 내면적 간접화로 나뉩니다. 주체와 중개자 간의 경쟁이 존재하지 않는 관계가 외면적 간접화입니다. 이는 작품 <돈키호테> <보봐리 부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적과 흑>에서처럼 중개자를 경쟁 상대로 여기는 관계가 내면적 간접화입니다. 세르반테스나 플로베르는 외면적 간접화의 대표적 작가이며, 스탕달, 프루스트, 도스토예프스키는 내면적 간접화를 비중 있게 다루는 작가입니다.

 

  외면적 간접화에서는 주체가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중개자를 동경하게 됩니다. 반대로 내면적 간접화에선 주체가 중개자를 질투하고 원한을 품게 됩니다. 중개자를 통해 욕망을 품었으면서 주체는 역으로 중개자가 자신의 욕망을 방해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개자와 주체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대상은 작아지고 긴장감은 커집니다. 이 점을 가장 잘 표현한 소설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입니다. 중개자는 주체가 가지고 있는 욕망에 커다란 힘을 행사하지만, 주체는 심지어 스스로에게조차 그것을 감추려 합니다. 욕망의 자율성은 환상에 불과하며, 위대한 소설적명작들에 의해서만 폭로됩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신으로 비칠 것이다

  무언가를 갖고자 하는 욕망이나 융합하고자 하는 욕망은 개개의 주체의 고독감에서 비롯됩니다. 신앙이 죽어버린 현대, 인간은 신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개인들은 고독이라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그 고통을 타인과 나누는 대신에 자신의 마음속에 묻고 타인을 동경하고 갈구하여 스스로 욕망하고자 하는 의지를 자의로 포기해버립니다. 즉 타인을 신으로 가정하고 그들의 욕망을 모방해 초월을 향한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프루스트의 소설에서는 초라하고 성스러움에 굶주린 주체가 중개자를 신격화하는 예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속물근성은 동등한 지위에 있어야 할 개인이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주체와 중개자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또 속물의 모방이 자발적일수록 주체는 혐오감을 강하게 느낍니다. 그것은 도덕적 순수성과 속물근성에 대한 이해력이 반비례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속물만이 속물 근성을 이해하고 거기서 괴로움을 느낍니다. 이 분노는 타인에게는 놀라울 정도로 통찰력을 발휘하면서 스스로에 대해서는 맹목 하고 무지한 존재로 만듭니다.

 

  중개자가 주체와 더 가까울수록 욕망은 더 강해지고, 중개자와 주체자가 멀수록 포괄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는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후자의 예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들 수 있습니다. 중개자가 가까워질수록 형이하학적 역할은 감소하고 형이상학적인 역할은 증가합니다. 욕망의 강도는 형이하학적 가치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같은 사교계의 허영을 욕망해도, 귀족의 현실적인 이점을 동경하는 뤼시앵 뢰벤에서보다 프루스트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더 번민합니다. 형이상학적 가치는 형이하학적 가치와 서로 상쇄를 일으킵니다.

 

  한편 주체가 대상을 소유하면 신격은 제거되고 실망만이 남습니다. 이 실망은 주체와 중개자 사이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커집니다. 희생자는 그 욕망의 본질을 깨닫는 대신 새로운 욕망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중개자가 가까이 있을 경우에는 대상 대신 중개자를 검토하고, 그를 바꾸게 됩니다. 중개자와 주체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주체의 통일성은 갈래갈래 찢어지게 됩니다.

 

주인과 노예

  내면적 간접화에서도 사람들은 모방자를 모방합니다. 형이상학적 욕망은 전염성이 강하고, 이 전염성은 주인공과의 거리가 가깝거나 자주 접촉하는 사람들, 특히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게 더욱 강하게 작용합니다. 같은 욕망이 공유되고 새롭게 생긴 욕망의 삼각형은 모태와 겹쳐집니다. 이것을 이중 간접화(또는 상호 간접화)라고 합니다. 전염이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집단으로 번져나갈 경우 다중 간접화가 이뤄질 수도 있습니다.

 

  예외적으로 성적 욕망에서는 경쟁자의 존재가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이 경우의 삼각형은 사랑을 하는 자(주체), 사랑 받는 자(중개자의 자리), 사랑 받는 자의 육신(대상)을 꼭지점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특별한 이중 간접화의 형태를 들어 교태라고 합니다. 교태를 부리는 사람이 연인의 고통에 보이는 무관심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욕망의 다른 표현입니다. 무관심은 욕망의 결여가 아니지만 관찰자에게는 자기 자신의 욕망을 외면하는 양상으로 비칩니다. 그리고 거기서 모방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연인의 욕망을 강화시켜 결과적으로 이 이중 간접화의 악순환은 반복됩니다.

 

  내면적 간접화의 세계에서 모든 욕망은 동일한 대상을 향한 경쟁적인 욕망들을 생겨나게 할 수 있습니다. 대상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느끼는 욕망을 감추고 느끼지 않는 욕망을 가진 척 가장하는 전략을 사용해야 합니다.. 서로를 간접화하는 사랑 역시 투쟁입니다. 먼저 자신의 욕망을 표출한 주체는 진 것이며, 노예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중 간접화에서도 자율성은 환상이고, 소설 만이 자아와 타인 사이의 적대적 대화를 암중모색합니다.

 

주인공의 고행

  내면적 간접화 중에서도 이중 간접화는 그 자체로 완결된 구조라 할 수 있습니다. 욕망은 그 안에서 순환하며 자체의 자양분으로 자라납니다. 서로가 서로의 욕망을 복사하는 이중 간접화에서 주체가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경쟁자의 욕망을 유발하거나 배가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욕망 성취를 위해서는 그 의도를 숨겨야 합니다. 스탕달은 이 은폐 행위를 위선이라고 명합니다. 위선을 반하고 욕망을 드러내는 주체는 반드시 그 처벌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종교의 고행과 일맥상통합니다. 남녀 간의 사랑에서도, 주체가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을 감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대상의 욕망을 스스로에게 투영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대상을 향한 충동을 억제해야 합니다. 여기에서도 고행이 일어납니다. 거짓 무관심으로 사람들의 욕망을 끄는 댄디즘 역시 마찬가지로 위선입니다. 하지만 욕망하는 주체가 마침내 대상을 손에 넣는 일이 있어도 대상은 그 즉시 가치를 상실해버립니다.

 

매저키즘과 새디즘

  고통 따위의 불쾌한 것들은 욕망의 대상이 아닙니다. 매저키스트들은 단순한 모멸감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견뎌서라도 자신의 상황을 타개해 줄 수 있는 중개자를 찾기 위해 탄생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성적인 매저키즘의 경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중개자와 대상이 일치하면 좋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매저키스트는 자신의 욕망을 모방하는 것에 그칩니다. 그가 욕망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닌 중개자의 존재입니다.

 

  이중 간접화에서 굴복한 상대, 즉 노예에게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주인의 흥미는 굴복하지 않는 상대에게로 옮겨갑니다. 이 상태의 주인은 매저키스트입니다. 한편 노예 역시 매저키스트가 되는데, 스스로를 중개자에 비해 열등하게 느끼게 하는 점이 욕망을 배가시키기 때문입니다. 내면적 간접화의 하위 단계에서는, 주체의 자기 비하가 너무 심해서 자신의 판단을 전혀 신뢰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중개자와의 거리가 가까워져도 본질적으로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이기에, 형이상학적 욕망은 필연적으로 매저키즘으로 귀결됩니다.

 

  새디스트는 매저키스트의 미래입니다. 중개자가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신과의 접촉을 바라며 흉내 내는 것입니다. 형이상학적 욕망을 가진 1차적 모방자를 다시 모방하는 2차적 모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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