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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론] 르네 지라르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Part 2

by 희휘낙락 2022.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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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지라르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요약 Part 2

 

소설 기법의 문제

  스탕달은 욕망은 자연발생적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욕망을 전심전력으로 충족하기 위해 힘쓰는 사람을 귀족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여기에서 귀족은 열정과 동의적인 의미로 쓰입니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나 그들이 가진 특권을 부르주아 계층이 향유하게 되면서, 왕에게로 향하던 외면적 간접화는 다수에 대한 내면적 간접화가 되어버리고, 자신의 위계와 품성의 불일치로 인해 귀족들은 몰락하게 됩니다.

 

  이중 간접화로 인해 발생하는 언어의 변질은 소설가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스탕달의 소설에서는 이 변질이 초기에 머무릅니다. 그의 소설 속 욕망하는 주인공은 형이상학적으로 욕망하는 사람들 속에서 홀로 열정적으로, 또 자발적으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경우에는 정확히 그 반대입니다. 소설가별로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세르반테스 : 누구나 형이상학적 욕망을 품고 있지만 거기에 전적으로 지배되지는 않습니다.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욕망은 일반적인 규범입니다.
  • 스탕달: 주체와 상대를 대비해 허영심이 강한 상대에게는 열정적으로, 약한 상대에게는 그 반대로 상대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여기에 이르러 자발적 욕망은 예외가 됩니다.
  • 플로베르: 자발적 욕망의 역할이 미미하여 소설의 폭로자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가짜 열거법, 가짜 대조법을 이용해 공허한 대립항을 만들어 허망함을 표현합니다. 스탕달 이후로 소설 내의 대립적인 질서가 사라집니다. 자발적인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으나 그 수나 중요성이 감소합니다.

 

  소설에서의 화해는 복합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첫 번째 가치인 미학을 제외하고도 윤리적인 가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타인과 자아, 관찰과 자기성찰의 종합을 가능하게 하고, 작중 인물들의 주변을 돌아보게 하며, 삼차원과 더불어 진정한 자유와 활기를 부여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프루스트는 우리에게 속물근성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속물이 원하는 것은 오직 형이상학적인 가치들, 즉 허무함입니다. 그의 소설을 통해 욕망의 삼각형 구조, 적대자들의 무익한 대립, 숨은 신에 대한 증오, 추방 그리고 내면적 간접화를 불식시키는 금기들을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속물에게 있어서 가치는 오직 타인의 재단에 맡겨집니다. 타인의 욕망만이 욕망을 발생시키며, 미시세계에서 거시세계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동일한 욕망만이 승리를 거둡니다. 물론 그 내부에는 허무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소설의 진실의 점진적인 확산은 속물근성이라는 용어를 가장 다양한 종류의 직업과 각양각색의 계층에까지 확장시킵니다. 또한 세계대전 같은 사회현상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습니다. 프루스트는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총체적인 그의 소설은 사회 문제를 완벽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프루스트의 작품에는 언제나 오해로 귀착되는 본질을 지닌 소설의 상황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직관이 담겨 있습니다. 소설의 오해는 본질적인 것으로, 자만성은 필연적으로 오해를 범하게 됩니다. 오해하고 있는 양쪽은 서로에게 대척점이지만, 소설가에게 있어서는 둘 모두가 모여야 완전해집니다.

 

  프루스트의 소설에서 소설가는 형이상학적 욕망이 치유된 주인공입니다. 소설가는 변모된 주인공의 입을 빌려 욕망의 삼각형을 폭로합니다. 그 과정을 셋으로 나눈다면, 첫 번째 시기에서는 사람들이 제시되고, 두 번째 시기에서 균열이 일어나며, 세 번째 시기에서 결국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각 단계는 전 단계의 극복이며 역전입니다.

 

  플로베르에 이르러서는 스탕달이나 플로베르 때와는 달리 인물들의 입을 빌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플로베르는 여기에 시간의 경과라는 새로운 차원을 덧붙여 그들이 저지르는 모순을 드러내 삼각형을 폭로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기본 방식은 소설의 다양한 인물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모든 관계들을 빠짐없이 대조하는 것입니다. 프루스트의 시기 분배 기준을 빌려와서 표현하자면, 그의 소설은 프루스트의 첫 번째 시기가 생략된 양상을 보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역시 프루스트처럼 화자의 의식을 이용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실용적인 목적입니다. 또한 일종의 전지적 작가화가 아닌 화자의 무능함과 불완전함 역시 기술의 일부라는 점이 특징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자발적 욕망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많은 점이 유사해 보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점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자유를 남에게 양도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작중의 주인공과 분리되어 있으며, 도스토예프스키는 심리적 통일성과 형이상학적 통일성 모두를 거부합니다.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시작으로, 그는 그것을 폭로하기 시작합니다. 그 폭로를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비평하는 올바른 방법입니다.

 

  그의 소설은 묵시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욕망이 발전해 파괴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존재론적 질환은 중개자와 주체가 가까워질수록,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 나타나듯 자기 파괴의 양상으로 악화되어 결국 생의 마지막에 이르게 됩니다.

 

결론

  욕망의 진실은 죽음이더라도, 죽음 자체가 소설 작품의 진실인 것은 아닙니다. 스탕달, 세르반테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주인공은 죽으면서 현재까지의 중개자에게서 신성을 추구하던 자신을 부정합니다. 그리고 이때에 이르러서야 굴절된 초월, 즉 간접화는 사라지고 수직적 초월이 이루어집니다. 소설가는 자신 역시 중개자와 마찬가지라는 점을 깨닫고, 자신의 자존심을 극복해야 합니다. 명작 소설은 욕망과 화해한 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상

  형이상학적인 욕망은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필연적으로 구체적인 현세에 현현할 양태가 필요합니다. 르네 지라르는 그 양태를 중개자라는 단어를 이용해 많은 뜻을 집약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삼각형 이외에도 자기 자신을 중개자로 삼는 경우 등 재미있는 삼각형이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무척이나 흥미롭고 유용하고 (저자는 이 말을 싫어할 것 같지만) 기발한 이론입니다. 특히 어떤 것이 실재하고, 그것에 대해 스스로 욕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은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는 통찰이 빼어납니다. 이 책은 소설 내에서 일반 원리를 캐어내, 욕망이 복사되어 상품 대신 이미지를 파는 광고나, 매저키스트새디스트 등의 사회적, 심리적 현상까지 나름대로 규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이상학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가치가 없으며, 헛된 고민에 불과하고, 오직 화해(혹은 다시 쓰자면 자포자기)만이 구원이 된다는 견해에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모든 형이상학적 욕망이 덧없다 하더라도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까지 실패로 묶는 것은 옳은 일일까? 르네 지라르는 모든 자발적인 욕망의 환상이 자기기만 위에 세워진 거짓이라 의미가 없다고 단정합니다. 하지만 소설가들이 저술하는 어떤 구원도 거저 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르네가 주장하는 수직적 초월 역시 굴절된 초월을 거치며 괴로워하던 주인공들의 자발적인 욕망의 환상을 통해 겪은 사색의 결과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간접화는 단순히 초월해야 하는 대상이 아닌 수직적 초월의 일부이며 함께 포용하는 무언가 일 수도 있습니다. 그 과정 전체가 르네가 주장하는 화해-자기 자신과 욕망의 포기-와는 전혀 다른, 진정한 의미의 형이상학적 욕망과의 화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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